보은 속리산 말티재
엔진 소리 마저 풍경이 되는 열두 번의 굽잇길

내비게이션은 끊임없이 최적의 경로를 제안한다.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인 길. 충북 보은 속리산으로 향하는 여정에서도 ‘말티재 터널’을 부르는 목소리는 어김없이 울린다.
불과 1분이면 통과하는 이 현대 문명의 이기는 시간을 아껴주는 확실한 선택지다. 하지만 바로 그 갈림길에서, 잠시 망설이게 만드는 낡은 표지판이 있다. ‘말티재 옛길’.
어쩌면 이 망설임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속도를 버리고 기꺼이 풍경 속으로 핸들을 꺾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방문객에서 길과 교감하는 여행자로 거듭난다.
보은 속리산 말티재 드라이브

본격적인 드라이브의 시작점이자 여정의 하이라이트를 감상할 수 있는 말티재 전망대는 충북 보은군 장안면 속리산로 1056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주소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반드시 그 길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한다.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12개의 급커브 구간은 운전자에게 끊임없는 집중을 요구한다. 엔진의 낮은 웅얼거림,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감아 도는 미세한 마찰음까지 고요한 숲속에서는 하나의 교향곡이 된다.
창문을 열면 계절의 향기가 훅 밀려 들어온다.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가을이면 불타는 단풍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직선 도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스티어링 휠을 돌릴 때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경의 변주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 길 위에서 속도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브레이크를 밟을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고, 천천히 움직일수록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지리산 정령치나 강원도 한계령과는 또 다른, 왕의 역사가 깃든 이야기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내가 지나온 길

그렇게 열두 굽이의 감각적인 드라이브를 마치고 정상에 다다르면, 2020년 문을 연 말티재 전망대가 기다린다. 높이 20m, 나뭇잎을 형상화한 나선형 구조의 전망대는 그 자체로도 독특한 볼거리다.
입장료나 주차료 없이 무료로 운영되는 이 공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2층 카페를 지나 전망대 끝에 서면, 발아래로 방금 내가 지나온 12굽이 꼬부랑길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아찔한 곡선을 그리고, 울창한 숲이 도로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풍경. 그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가 그저 길을 운전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예술 작품의 일부가 되어 움직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특히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10월 말이 되면, 붉고 노란 물감이 캔버스 위를 흐르는 듯한 비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최대 70명까지 수용 가능한 전망대 끝에서 S자 도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말티재를 찾은 이들만의 특권이다.
세조의 눈물과 왕건의 발자취가 깃든 길

속리산 말티재 드라이브길은 단순히 경치가 아름다운 길을 넘어선다. 이 길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관통해왔다.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지독한 피부병을 앓았고, 그 치료를 위해 신미대사가 머물던 속리산 복천암으로 향했다.
조선왕조실록은 1464년, 왕의 고통스러운 행차가 있었음을 기록한다. 임금이 타는 어가마저 오르기 힘든 이 험준한 고갯길 앞에서, 세조는 결국 말로 갈아탔다고 전해진다.
‘말티재’라는 이름은 바로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왕의 절박함이 깃든 이 길은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2004년, 교통 편의를 위해 말티재 터널이 개통되면서 지방도 505호선의 옛 구간이었던 이 길은 본래의 임무를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보여주는 관광 도로로 다시 태어났다. 효율성이 역사를 보존한 아이러니한 결과다.
터널을 택했다면 1분 만에 잊혔을 풍경과 이야기. 그러나 기꺼이 10여 분의 시간을 투자해 옛길을 달리는 것은, 그 수백 년의 시간을 존중하는 우리만의 방식일지 모른다.
경사가 가파르고 커브가 잦아 초보 운전자라면 주의가 필요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아간다면 그 누구라도 안전하게 이 길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속도를 줄일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는 곳.
오늘만큼은 내비게이션의 재촉을 잠시 무시하고, 말티재 꼬부랑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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