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시심이 깃든 다도해의 섬

봄 햇살이 바다 위에 부서지는 오후, 수평선 너머로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쌓이는 풍경이 있다. 물빛은 짙은 쪽빛이다가도 바람이 스치면 은빛으로 바뀌며, 섬 안쪽에 자리한 숲에서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조선 최고의 시인이 태풍을 피해 잠시 들렀다가 10여 년을 머문 곳이 이 섬이다. 그는 이곳에서 정자를 짓고 연못을 다듬으며 우리 시가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어부사시사를 완성했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에 품긴 이 섬은 자연과 인문이 드물게 조화를 이룬 공간이다.
몽돌 해변을 걸으면 발밑에서 파도가 자갈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해안선을 따라 방풍림처럼 늘어선다. 역사와 생태가 겹겹이 쌓인 이 섬의 매력은 계절이 바뀔수록 더 깊어진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의 섬, 보길도의 역사와 입지

보길도(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보길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 섬으로, 완도 본섬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다. 조선 중기 문인 고산 윤선도가 병자호란의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제주도로 향하던 길에 태풍을 만나 이 섬에 발을 딛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섬의 풍광에 반해 머물기로 결심하고, 이후 10여 년에 걸쳐 세연정과 낙서재를 비롯한 건물 25동을 지으며 섬 전체를 하나의 원림으로 가꾸었다.
섬의 지명 ‘부용동’도 그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우암 송시열 또한 83세의 나이에 귀양을 오던 중 백도리 바닷가 바위에 글씨를 새겼으며, 그 바위는 지금도 ‘글씐바위’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조선 문인 두 사람의 발자취가 동시에 남은 섬은 흔치 않다.
세연정과 어부사시사, 원림이 품은 시가 문학의 공간

보길도의 핵심은 단연 윤선도원림이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성된 이 원림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린 조선식 정원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윤선도는 이곳에 앉아 연못에 비치는 산 그림자와 물결을 바라보며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물과 그 주변에 배치된 바위, 소나무, 대나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지며, 방문객은 400년 전 시인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다. 낙서재는 윤선도가 실제 거처로 사용하던 공간으로 원림의 안쪽에 자리한다.
세연정과 낙서재를 잇는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섬 전체가 하나의 정원처럼 설계되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특히 봄과 가을에는 원림 주변의 동백과 단풍이 물들어 계절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송리 몽돌 해변과 천연기념물 상록수림

보길도의 자연 중 예송리 해수욕장은 빼놓을 수 없다. 1.4km에 달하는 자갈밭 해변은 모래 대신 크고 작은 몽돌이 깔려 있어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독특한 소리를 낸다. 해변 뒤편으로는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예송리 상록수림이 약 740m 길이로 이어진다.
약 300년 전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이 숲은 반달 형태로 해안선을 감싸며 방풍림과 어부림의 역할을 동시에 해왔다. 후박나무, 생달나무, 황칠나무 등 난대 수종이 촘촘히 자라는 이 숲은 생태적 가치가 높아 탐방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험이 된다.
예송리 인근의 보옥리에는 둥글둥글한 자갈이 공룡알처럼 쌓여 있는 공룡알 해변이 있으며, 섬 서쪽 끝 망끝 전망대는 다도해 일몰을 감상하기 좋은 명소로 꼽힌다.
보길도 접근 방법과 윤선도원림 이용 안내

보길도로 가려면 여객선을 이용해야 한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동천항까지, 또는 해남 땅끝항에서 노화도 산양진항까지 선박으로 30~40분이 소요된다. 노화도에 내린 뒤에는 보길대교를 건너 육로로 보길도에 진입한다.
완도읍 터미널에서 화흥포항까지는 셔틀버스가 운행되어 대중교통 이용객도 접근하기 어렵지 않다. 다만 화흥포항 출발 배편은 동절기(10~2월)와 하절기(3~9월) 시간표가 달리 운영되므로, 출발 전 반드시 확인이 필요하다.
보길도 섬 입도는 연중 개방되어 있다. 단, 윤선도원림(세연정)은 매주 월요일 휴관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원림 관람료는 별도로 부과되며 성인 기준 3,000원이다.

조선의 시인이 스스로 찾아들어 10년을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보길도는 범상한 섬이 아님을 직감하게 된다.
원림의 정자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경험과 몽돌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듣는 시간이 하나의 여행 안에서 겹친다.
다도해의 섬들이 노을 속에 실루엣으로 잠기는 저녁, 망끝 전망대에 서서 그 풍경을 눈에 담고 싶다면 이 섬으로 향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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