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인정할 만하네”… 호수 위 새하얀 설경 펼쳐지는 왕의 비밀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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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실질적 법궁의 설경 명소

창덕궁 정자 설경
창덕궁 정자 설경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눈이 내린 뒤 궁궐의 선은 유난히 또렷해진다. 지붕의 곡선과 담장의 윤곽, 연못 가장자리의 형태가 한 번 더 강조되면서 풍경이 정적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이런 계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품은 공간이 있다.

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시작해, 임진왜란을 지나 다시 지어지고, 긴 세월 왕실의 일상이 쌓인 궁궐. 자연 지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건물을 배치한 특징까지 더해져 1997년 12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설경
창덕궁 후원 설경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됐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며 큰 변화를 맞는다. 이후 중건이 진행됐고, 1610년에는 법궁으로 선포됐다. 중건 공사 자체는 1605년부터 1610년 사이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정리된다.

특히 1610년부터 1867년 경복궁 중건까지 약 270년 동안 창덕궁이 더 많이 사용되며 실질적인 법궁 역할을 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창경궁과 경계 없이 이어져 ‘동궐’이라 통칭된 관계 역시, 이 공간이 단일 궁궐을 넘어 왕실 생활권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창덕궁에는 근대사의 장면도 남아 있다.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에서는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한일병합이 결의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 공간 안에 조선의 일상과 대한제국 말기의 역사가 겹쳐져 있다는 점이 창덕궁의 무게를 더한다.

‘후원’이라는 이름의 비밀 정원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후원은 1406년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됐고, 1463년에는 크게 확장됐다. 성종 대에는 창경궁 영역까지 이어지며 범위가 넓어졌고,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된 뒤 1610년 다시 조성된 흐름이 확인된다.

후원은 4개 골짜기 권역을 중심으로 공간이 펼쳐진다.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으로 이어지는 구성인데, 자연 지형을 바탕으로 연못과 정자가 배치돼 ‘정원’이라는 말보다 더 깊은 정취를 만든다.

참고로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은 1904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오늘날 익숙한 이름과 실제 역사적 층위를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애련지와 관련해 흔히 회자되는 특정 인물과의 연결 전언은, 1692년 애련정 건립과 ‘연꽃을 사랑한다’는 의미까지는 확인되지만 그 연결고리 자체는 근거 확인이 필요한 영역으로 남는다.

계절이 드러내는 후원의 또 다른 얼굴

창덕궁 후원 겨울
창덕궁 후원 겨울 /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지호

후원의 중심에 놓인 부용지는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학문과 교류의 장소였다. 사각형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을 두고, 그 위로 부용정이 자리한 구조는 상징성이 분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며 학문과 정사를 함께 논했다. 연못을 둘러싼 관람정과 주합루, 규장각으로 이어지는 배치는 후원이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정치와 학문의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애련지는 비교적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다. 숙종 대에 조성된 연못과 애련정이 어우러지며, 여름에는 연꽃이, 겨울에는 수면과 정자의 선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관람지와 옥류천으로 들어갈수록 후원은 점점 깊어진다. 특히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안쪽 골짜기에 자리하며, 바위와 물길을 따라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펼쳐진다. 다만 문화재 보존을 위해 혹서기와 혹한기에는 관람 동선이 일부 조정되거나 제한될 수 있다.

관람을 위한 기본 정보

창덕궁 인정전 겨울
창덕궁 인정전 겨울 /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지호

창덕궁 후원 관람은 자유 관람이 아닌 해설사 인솔 방식으로 운영된다. 회차별 관람 인원은 최대 100명으로 제한되며, 인터넷 예매와 현장 선착순으로 나뉜다. 이 같은 운영 방식은 후원의 자연 환경과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관람은 정시 입장 방식이기 때문에 여유 있게 도착하는 것이 좋다. 또한 정문인 돈화문이 아닌 별도의 후원 입구를 이용하게 되며, 관람 종료 후 출구 역시 다르게 설정돼 있다. 계절에 따라 길이 미끄러울 수 있어, 특히 겨울에는 보행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창덕궁 겨울 모습
창덕궁 겨울 모습 /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지호

창덕궁의 또 다른 특징은 근대사의 흔적이다. 낙선재 권역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거주했던 공간으로, 순정황후가 1926년 이후 머물다 1966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 역시 이 일대에서 생활하며 궁궐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했다. 화려함보다는 고요함이 남아 있는 이유다.

궁궐은 과거의 유산이지만, 창덕궁은 그 시간이 한 겹씩 쌓여 오늘까지 이어진 공간이다. 약 270년 동안 왕들이 머물렀던 생활의 흔적, 전쟁과 중건의 기억,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후원의 풍경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내는 이 궁궐은,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음미하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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