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추정리 메밀밭
가을 언덕을 덮은 하얀 물결의 비밀

가을의 상징이 울긋불긋한 단풍뿐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아직 청주의 가장 비밀스러운 가을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단풍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청주 낭성면의 한적한 골짜기에는 마치 한겨울의 폭설이 내린 듯 새하얀 눈밭이 펼쳐진다.
이곳은 단순한 꽃밭이 아니다. 3대에 걸쳐 토종벌을 지켜온 명인의 40년 세월과, 수억 마리 꿀벌의 날갯짓이 함께 빚어낸 살아있는 예술작품이다. 오는 19일이면 막을 내리는 이 기적 같은 풍경 속으로, 마지막 가을 여행을 떠나보자.
“이 풍경의 진짜 주인은 사람이 아닌 ‘벌’입니다”

추정리 메밀밭의 공식 주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 339-2지만, 이곳의 진짜 시작점은 ‘토종벌 명인 1호’ 김대립 씨의 이야기에서 찾아야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40여 년간 토종벌을 사육해 온 그에게 이 3만㎡(약 9천 평)의 땅은 사람을 위한 관광지가 아닌, 오직 꿀벌들을 위한 거대한 식량이자 낙원이었다.
봄에는 유채를, 8월에는 메밀 씨앗을 뿌려 조성한 ‘밀원(蜜源)’. 우리가 보는 황홀한 풍경은 사실 벌들을 위한 그의 오랜 헌신이 빚어낸 아름다운 부산물인 셈이다.

이곳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사진작가들의 성지가 된 이유는 독특한 지형에 있다. 평지가 아닌 경사진 언덕을 따라 하얀 메밀꽃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풍경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때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입체감을 선사한다.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에 이곳을 찾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명과 새벽안개가 언덕 위 메밀밭과 어우러지는 찰나의 순간은, 오직 자연과 시간만이 허락하는 경이로운 예술작품과 같다.
마을의 인심을 맛보는 축제

2025 추정리 메밀꽃 축제는 이 특별한 공간의 가치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명인과 추정2리 마을회, 그리고 천년추정협동조합이 함께 마련한 자리다.
지난해에만 10만 명 이상이 다녀간 이 축제의 핵심은 단연 ‘진정성’이다. 축제장에서는 김대립 명인이 메밀밭에서 직접 채취한 진짜 토종꿀을 맛보고 구매할 수 있으며,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직거래 장터에서는 지역 특산품과 따뜻한 인심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이곳의 입장료 5,000원은 그래서 단순한 관람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40년간 벌들을 위해 묵묵히 밭을 일궈온 명인의 집념과, 이 독특한 생태계를 함께 지켜나가는 지역 공동체에 대한 응원이자 존중의 표시다.

하얀 메밀꽃 사이를 거닐며 윙윙거리는 벌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은 이곳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경험이지만, 벌이 많은 만큼 강한 향의 향수는 피하는 것이 좋다.
축제는 10월 19일까지만 열리며, 운영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입구의 무료 주차장이 매우 협소해 늦게 도착하면 ‘추정1구 마을회관’에 주차 후 약 20분간 오르막길을 걸어야 하니, 편한 신발은 필수다.
조금의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언덕에 올라섰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새하얀 세상은 모든 힘듦을 잊게 할 만큼 황홀한 보상을 안겨줄 것이다. 짧은 가을, 붉은 단풍이 아닌 순백의 감동을 찾고 있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전체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