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보다 풍경에 압도된다”… 300년 고목이 살아 숨 쉬는 가을 산책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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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주산지
새벽 물안개 속 왕버들 군락

주산지 가을 절경
주산지 가을 절경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잔잔한 수면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그 안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고목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신비로운 풍경은 왠지 낯설지가 않다. 세계적인 거장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통해 전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된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아직 주산지의 진짜 매력을 반도 보지 못한 것이다. 이곳은 단순한 저수지를 넘어, 조선의 역사와 유네스코가 인정한 땅의 비밀을 품고 있는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다.

“300년 된 물속 숲, 마르지 않는 샘의 비밀을 품다”

주산지 밤 풍경
주산지 밤 풍경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국가명승 제105호 청송 주산지 일원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73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역사는 3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숙종 46년(1720) 8월에 첫 삽을 떠, 이듬해인 경종 원년(1721) 10월에 완공된 인공 저수지다.

척박한 땅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결과물인 셈이다. 놀라운 점은 축조 이후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이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발밑의 땅,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비밀과 맞닿아 있다.

주산지 가을
주산지 가을 /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지호

주산지와 주왕산 국립공원 일대는 과거 격렬했던 화산 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뜨거운 화산재가 쌓이고 굳어져 형성된 ‘응회암’이라는 독특한 암석이 넓게 분포하는데, 이 암석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었다가 조금씩 흘려보내는 성질을 지녔다.

비가 내리면 응회암층이 물을 가득 저장했다가, 계곡을 통해 주산지로 꾸준히 흘려보내기 때문에 저수지는 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00년 전의 조상들이 이 지질학적 특성까지 내다보고 저수지를 축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결과물은 자연과 인간의 지혜가 빚어낸 완벽한 합작품으로 남아있다.

물속에 뿌리내린 고목, 왕버들의 경이로운 생명력

주산지 가을 단풍
주산지 가을 단풍 /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지호

주산지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단연 물속에 잠긴 채 하늘로 가지를 뻗은 왕버들 군락이다. 150년에서 길게는 300년으로 추정되는 수령의 왕버들 20여 그루는 저수지가 처음 생겨날 무렵부터 이곳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보통의 나무라면 물속에서 뿌리가 썩어 고사하기 마련이지만, 주산지의 왕버들은 수백 년의 세월을 물에 잠긴 채 꿋꿋이 버텨왔다. 이는 사계절 내내 수위 변동이 거의 없는 안정적인 환경 덕분이다.

특히 가을이면 주산지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달한다. 붉고 노랗게 물든 주변 산세가 맑은 수면에 그대로 투영되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녘의 왕버들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그려내는 풍경 덕분에 주산지는 영화의 배경을 넘어, 수많은 사진작가와 여행객들에게 영감을 주는 ‘출사 1번지’로 자리매김했다.

청송 주산지
청송 주산지 /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지호

탐방은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입구에서 주산지 전망대까지는 약 1km, 경사가 완만한 흙길과 데크길이 이어져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주왕산 국립공원 규정에 따라 주차료(성수기 승용차 기준 5,000원)는 별도다. 하절기(3~10월)에는 새벽 4시부터, 동절기(11~2월)에는 새벽 5시부터 입산이 가능해 신비로운 아침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왕산 국립공원의 웅장한 기암괴석과 단풍을 먼저 즐긴 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주산지를 찾아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여행 코스다.

화려함보다는 고요함 속에서 자연의 숭고함과 시간의 깊이를 느끼고 싶다면, 올가을 주산지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될 목적지다. 300년의 세월이 고여 만들어낸 물속 신선계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온전히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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