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명옥헌 원림, 입장료 없이 만나는 조선의 여름 풍경

온통 짙은 녹음으로 가득한 여름, 화려한 축제도 좋지만 때로는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깊은 위안을 얻고 싶을 때가 있다. 이곳은 단순히 붉은 꽃이 주인공인 정원이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 이전에, 자연의 소리를 벗 삼아 마음을 닦고자 했던 조선의 한 선비의 이야기가 먼저 흐르는 곳이다. 구슬 구르는 듯 맑은 물소리가 흐르는 집, 담양 명옥헌 원림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붉은 꽃그늘 아래, 맑은 물소리…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국가 명승 제58호로 지정된 담양 명옥헌 원림은 전남 담양군 고서면 후산길 103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선비 오희도(1583~1623)가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귀의하여 살던 집터에 조성된 정원이다.
‘명옥헌(鳴玉軒)’이라는 이름부터 이곳의 본질을 말해준다. 바로 ‘구슬이 부딪쳐 울리는 듯한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시각적 아름다움보다 청각적 맑음을 우선했던 선비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정원은 인위적인 화려함을 철저히 배제했다. 주변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계곡물을 받아 네모난 연못을 만들었고, 그 곁에 정자를 세워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방문객은 별도의 입장료나 주차 요금 없이 이 고요한 위로의 공간을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선비의 이상이 담긴 네모난 연못

명옥헌의 중심에는 네모난 연못 ‘방지(方池)’가 있다. 이는 ‘땅은 네모나다’는 동양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상징한다. 연못 중앙에는 둥근 섬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작은 연못 하나에도 하늘과 땅, 즉 우주를 담아내려 했던 선조들의 깊은 철학이 담겨있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으면 시원한 그늘 아래로 주변의 산과 나무가 연못에 그대로 비치는 ‘차경(借景)’의 미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인공적으로 꾸민 것이 아닌, 자연 풍경 그 자체를 정원의 일부로 끌어들인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 위로 잔잔한 물결이 번지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더해지면 왜 이곳의 이름이 ‘명옥헌’인지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100일의 약속, 여름을 품은 배롱나무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 가장 화려해지는 시기는 바로 7월부터 9월까지다. 연못 주변과 정자 주변으로 심어진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다.
한번 피면 100일 동안 붉은빛을 유지한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명옥헌의 여름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진분홍빛 꽃송이들은 초록의 잎사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정원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나무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꽃잎들이 눈처럼 흩날려 연못 수면 위로 내려앉는다. 마치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몽환적인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며,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몇 번이고 멈추게 만든다.

담양 명옥헌 원림은 단순히 예쁜 사진을 남기는 꽃구경 명소를 넘어선다. 조선 선비의 고고한 정신과 자연의 소리, 그리고 한여름의 붉은 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온전한 쉼을 얻고 싶다면, 올여름 명옥헌의 정자 마루에 앉아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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