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관방제림
370년 제방 위에 피어난 황금빛 숲길

가을 숲의 미덕이 오직 화려한 붉은빛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담양의 진짜 가을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붉은 단풍잎 대신 거대한 고목의 황금빛 잎사귀가 융단처럼 깔리고, 화려함 대신 370년의 시간이 쌓인 고동색 줄기가 기품을 뽐내는 곳. 약 2km에 걸쳐 장대한 터널을 이루는 이 숲은, 애초에 아름다움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치열한 재난 극복 프로젝트가 빚어낸 위대한 결과물, 담양 관방제림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숲으로 공인받은 이곳이 어떻게 17세기의 지혜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역사를 따라 걸었다.
“2km의 숲 터널, 사실은 370년 된 제방”

담양 관방제림의 공식 주소는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객사리 1-1번지 일원이다. 이 주소는 숲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담양천(영산강 상류)의 제방을 가리킨다. 이 숲의 정체성은 이름에 그대로 담겨있다. ‘관방제’란 ‘관에서 홍수를 막기 위해 쌓은 제방’이라는 뜻이다.
역사는 조선 인조 26년인 16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담양천은 매년 여름철이면 거센 물줄기로 범람하여 백성들의 터전과 농경지를 휩쓰는 골칫거리였다. 이에 담양부사로 부임한 성이성은 수해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인다. 바로 거대한 흙 제방을 쌓는 일이었다.
하지만 흙으로만 쌓은 둑은 거센 물살에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성이성 부사는 제방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물살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둑 위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꼽히는 ‘관방제림’의 시작, 즉 ‘호안림’의 등장이었다.
붉은 단풍 대신 ‘푸조나무’와 ‘팽나무’가 가득한 이유

관방제림의 가을이 이국적인 붉은빛이 아닌 토종의 황금빛과 고동색으로 물드는 것은 이 숲의 태생적 목적과 직결된다. 제방을 지키기 위해서는 뿌리가 깊고 넓게 퍼져 흙을 단단히 붙잡아주며, 물을 좋아하는 나무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바로 푸조나무, 팽나무, 개서어나무 등 우리 땅의 고목들이다. 현재 관방제림에는 수령 300년에서 400년에 달하는 이 거대한 나무 약 180여 그루가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특히 수백 년의 풍상을 견딘 푸조나무와 팽나무가 엮어내는 2km의 숲 터널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생명력을 뿜어낸다.
가을이면 이 나뭇잎들이 빚어내는 깊고 차분한 황금빛은, 화려한 단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와 기품을 느끼게 한다. 재난을 막기 위한 실용적 선택이 수백 년 후 가장 한국적인 가을 풍경을 완성한 것이다.
17세기의 지혜, 21세기의 ‘천연기념물’이 되다

백성을 구하기 위한 한 관리의 지혜는 시대를 넘어 그 가치를 공인받았다. 국가는 1991년 숲 전체의 역사적,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천연기념물 제366호로 지정했다.
이는 단순한 ‘오래된 숲’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17세기에 조성된 인공 제방숲이 훼손되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조선시대의 치수 기술과 자연관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임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나아가 2004년에는 산림청 등이 주관한 ‘제5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명실상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한 관리의 실용적 지혜가 시대를 초월한 국가적 유산이자 최고의 생태 관광자원으로 완성된 순간이었다.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길을 잇는 ‘황금빛 앵커’

담양 관방제림의 또 다른 매력은 담양의 핵심 명소들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이다. 이 숲길은 입장료와 주차료가 모두 무료이며, 24시간 개방되어 언제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
숲길 바로 건너편, 징검다리 하나만 건너면 사계절 내내 푸른 대나무의 정수인 죽녹원이 펼쳐진다. 관방제림의 황금빛 터널을 빠져나와 죽녹원의 푸른 터널로 이어지는 코스는 오직 담양에서만 가능한, 색채와 시간의 대비가 극명한 최고의 산책로다.

또한, 관방제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국적인 붉은빛으로 유명한 ‘담양 메타세쿼이아길’이 자리한다. 이 세 곳은 각각 ‘황금빛(역사)’, ‘초록빛(일상)’, ‘붉은빛(이국)’이라는 담양의 3색 가을을 완성한다. 그중에서도 관방제림은 370년의 역사를 품고 두 명소를 잇는 굳건한 ‘역사적 앵커’ 역할을 수행한다.
올가을, 그저 눈이 즐거운 단풍이 아닌 가슴을 울리는 역사의 흔적을 걷고 싶다면, 370년 전 한 관리의 애민정신이 빚어낸 황금빛 숲 터널, 관방제림이 그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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