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가을이 멈추는 서울의 골목

차가운 바람이 서울의 빌딩 숲을 스치기 시작하면, 거대한 회색 도시는 마법처럼 가을빛으로 물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가을의 도착을 알리는 곳, 시간의 더께와 계절의 화려함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덕수궁과 그 둘레를 감싼 덕수궁 돌담길이다.
이곳의 가을은 한 가지 색으로 정의할 수 없다. 길 위에는 낭만이 노랗게 쏟아지고, 담장 안에는 역사의 무게만큼 붉은빛이 깊게 배어든다. 올가을, 우리는 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두 가지의 가을 이야기를 만나러 떠난다.
돌담길의 노란 가을

이야기의 서막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에 위치한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작된다. 회색빛 돌담을 따라 길게 이어진 은행나무들이 일제히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10월 말, 이 길은 서울에서 가장 로맨틱한 산책로로 변신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만 개의 은행잎이 황금빛 비가 되어 쏟아지고, 아스팔트 위는 이내 폭신한 ‘황금 카펫’으로 뒤덮인다.
경복궁의 웅장함과는 다른 아기자기한 멋이 있는 이 길은 가을의 서정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특히 평일 점심시간(11:30~13:30)에는 ‘차 없는 거리’로 변해, 오직 가을의 소리와 풍경에만 집중하며 걸을 수 있다.
돌담 위로 고개를 내민 노란 은행나무 가지와, 그 너머로 보이는 궁궐의 지붕, 그리고 현대적인 미술관 건물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걷는 내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혹은 홀로 사색에 잠겨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가을의 충만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궁궐의 붉은 가을

돌담길의 낭만에 흠뻑 젖었다면, 이제 그 감성을 안고 덕수궁 안으로 들어설 차례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 가을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곳은 대한제국의 황혼을 고스란히 지켜본 고종의 공간. 그래서일까, 궁궐 안의 단풍은 마냥 화려하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애잔하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전통 목조 건축물 사이사이와 연못가를 붉게 물들인 단풍나무들은 고즈넉한 궁궐의 정취를 한층 더 깊게 만든다. 특히 이곳 가을 풍경의 백미는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과 어우러진 단풍이다.
고전주의 양식의 회색빛 석조 건물과 그 앞을 강렬하게 채운 붉은 단풍의 색채 대비는, 동서양이 충돌하고 공존했던 격동의 시대를 상징하는 듯한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지켜봤을 늙은 나무들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단순한 풍경 이상의 역사적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가을 산책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

이 두 가지 가을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 몇 가지만 기억하자. 단풍의 절정은 보통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이어진다. 덕수궁은 매주 월요일이 휴궁일이며,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다.
성인(만 25~64세)은 1,000원의 입장료가 있다. 궁궐 내 주차는 불가하지만, 인근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주차장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서양식 건축의 진수를 보고 싶다면 석조전 내부 관람을 추천하지만, 이는 반드시 홈페이지를 통한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길 위에서는 낭만을, 담장 안에서는 역사를 품은 채 깊어가는 가을. 올가을에는 덕수궁 돌담길과 덕수궁이 들려주는 두 편의 가을 이야기를 차례로 음미하며, 서울의 중심에서 가장 풍요로운 계절의 한때를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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