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 숲의 붉은 봄

남도보다 한 박자 늦게 봄이 깨어나는 곳이 있다. 차가운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산자락에 붉은 기운이 번지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이 숲은 긴 겨울의 숨을 내쉰다. 사찰 담장 너머로 번지는 진홍빛은 먼발치에서도 시선을 붙든다.
한반도 동백나무 서식지 북방한계선 위에 자리한 이 군락은 제184호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생태적 보고다. 약 500년 수령의 나무들이 16,500㎡ 면적에 빽빽이 늘어선 풍경은, 남쪽 해안의 동백과는 다른 결의 묵직함을 품고 있다.
절 뒤 산자락을 30m 너비의 붉은 띠로 감싸며 이어지는 이 숲은, 봄마다 고창으로 향하는 발길을 불러 모은다. 동백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 왔음을 실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해마다 쌓인다.
방화림으로 조성된 500년 동백나무 군락의 역사

선운사(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는 도솔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다. 577년 백제 위덕왕 24년, 검단선사가 창건한 것이 정설로 전해지며, 조선 후기에는 89개 암자와 189개 요사를 아울렀던 대사찰이었다.
지금의 동백나무 숲은 그로부터 수백 년이 더 흐른 15세기 조선 성종 때, 행호 선사가 산불로부터 사찰을 지키기 위한 방화림으로 조성한 것이다.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 500년을 넘겨 살아남아 오늘날 천연기념물이 된 셈이다. 1967년 2월 17일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었으며, 차나뭇과에 속하는 동백나무 약 3,000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3,000그루가 만든 붉은 숲의 생태적 가치

평균 수고 6m 내외의 동백나무들이 절 뒤편 산 아래를 빼곡히 채운 모습은 압도적이다. 뿌리목 지름이 80cm에 이르는 노거수들이 수관 너비 8m를 자랑하며 나란히 서 있으며, 이 숲이 한반도 동백나무 서식지 북방한계선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생태적 희소성을 더한다.
남쪽 해안보다 개화 시기가 늦어 3월 말에 꽃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 절정에 이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숲 하층에는 석산(꽃무릇), 송악, 비자나무, 맥문동, 마삭덩굴 등 다채로운 식생이 자생하며, 단일 수종 군락이 아닌 복층 생태계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선운사 경내에는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도 함께 자리해 천연기념물 3점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동백연예술제와 봄철 연계 볼거리

동백 절정 시기인 4월 중순에는 제2회 ‘동백꽃 추억을 담다’ 핸드폰 아마추어 사진 콘테스트가 진행된다. 응모 기간은 3월 23일부터 4월 30일까지이며, 선운사 경내에서 핸드폰으로 직접 촬영한 사진을 1인 최대 2점까지 출품할 수 있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100만 원 상금과 부상이 주어지며, 총 10명의 수상자를 선발한다.
선운사 진입로에는 벚꽃이 동백 절정 시기와 맞물려 함께 만개하는 경우가 많아, 두 꽃을 배경으로 한 사진 작업도 가능하다.
가을에는 동백나무 숲 하층의 석산이 9월 10일~25일경 붉은 꽃무릇 군락으로 변모하며, 국내 최대 규모로 알려진 상사화 풍경을 선사한다. 선운사 인근에는 총면적 53만㎡의 선운산 생태숲도 조성되어 있으며, 생태연못·자연습지·팔도숲을 갖춰 연계 방문지로도 손색이 없다.
선운사 이용 정보와 방문 안내

관람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며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주차 공간은 약 400대를 수용하지만 동백 절정기 주말에는 오전 10시 이전에 만차가 되는 경우가 잦아 이른 방문을 권한다.
자가용 이용 시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 IC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대중교통으로는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흥덕행 버스를 타고 331번 버스로 환승하거나, KTX·SRT로 정읍역 하차 후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주차장에서 선운사 경내까지는 도보로 약 20분이 소요되며, 전기차 충전소 4기도 갖추고 있어 전기차 이용객에게도 편리하다.

500년을 버텨온 동백나무들이 사찰 담장을 두르듯 이어지는 이 공간은, 방화림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탄생했지만 지금은 그 자체가 귀한 자연유산이 됐다.
꽃이 송이째 떨어지는 봄날, 붉은 카펫처럼 깔린 낙화 위를 천천히 걷다 보면 시간의 무게가 새삼 달리 느껴진다. 봄이 깊어지기 전 고창으로 향해 500년의 붉음을 직접 마주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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