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환벽당
국가지정 명승에서 만나는 붉은 시간의 정원

세상 모든 그리움이 땅 위로 솟아오르면 이런 모습일까. 잎이 진 자리에 비로소 꽃이 피고, 꽃이 스러져야만 다시 잎이 돋아나는 애틋한 운명. 그래서일까, 이 꽃은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사연을 간직한 붉은 물결이 지금 광주광역시의 한 고즈넉한 언덕을 온통 뒤덮고 있다. 단순한 가을꽃 구경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이곳은 한 송이 꽃에서 시작해 위대한 문학가의 삶을 관통하는, 시간 여행의 출발점이다.
“혹시, 이 꽃이 ‘상사화’가 아니란 것 아셨나요?”

광주 최고의 꽃무릇 명소로 손꼽히는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북구 환벽당길 10에 위치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방문객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한 강렬한 붉은색 군락과 마주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이 붉은 꽃을 흔히 ‘상사화’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해 둘은 다른 식물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는 붉은 꽃의 정확한 이름은 ‘석산’, 즉 꽃무릇이다. 잎과 꽃이 평생 만날 수 없는 생태적 특성 때문에 ‘서로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상사화 속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진짜 상사화는 7~8월에 연분홍색 꽃을 피우는, 전혀 다른 종이다.

환벽당의 꽃무릇은 잎이 모두 사라진 맨땅에서 오직 꽃대 하나로 솟아올라 붉디붉은 자태를 뽐내기에 그 모습이 더욱 극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나무 그늘 사이로 햇살이 쏟아질 때마다 반짝이는 꽃술은 그 고결함을 한층 더한다.
이 애틋한 꽃의 사연은 환벽당이 품은 역사와 절묘하게 겹쳐진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사촌 김윤제가 관직을 떠나 “푸르름이 고리처럼 두른다”는 빼어난 풍광에 반해 지은 집이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는데, 그의 제자이자 조카사위였던 이가 바로 송강 정철이다.

김윤제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내던 정철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고, 이곳 환벽당으로 불러들여 약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직접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스승의 헌신적인 가르침 아래, 정철은 훗날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졌다.
잎이 져야 꽃이 피듯, 스승의 지혜가 온전히 스며든 뒤에야 비로소 제자의 재능이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일까.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스승과 제자의 깊고 끈끈했던 인연의 역사가 붉은 꽃무릇의 바다 위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하다.

환벽당은 그 자체로도 국가지정유산 명승 제107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자 건물뿐 아니라 주변의 자연과 경관이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모두 무료이지만, 주차 공간이 매우 협소하니 가급적 이른 시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짧아서 더 소중한 가을,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가장 깊이 있게 경험하고 싶다면 이번 주말에는 환벽당을 찾아보자. 그곳에서 당신은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을 넘어,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그리움과 마침내 완성된 인연의 위대한 서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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