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악동 도봉서당,
구절초 사이에 선 보물 석탑의 위엄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황리단길이나 동궁과 월지의 야경만이 경주의 전부는 아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진짜 경주’를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서악마을은 완벽한 대안이 된다.
특히 마을 가장 안쪽에 숨겨진 도봉서당 뒤편 언덕은 지금, 보물급 문화재와 신라 고분군을 병풍 삼아 피어난 구절초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단순한 꽃밭이 아니다. 새하얀 솜털 같은 구절초 사이로 1,300년 세월을 버틴 석탑이 솟아 있고, 발길을 옮기면 왕릉이 지척이다. 경주에서도 역사 밀도가 가장 높은 이 특별한 산책로에서 조용한 가을의 정수를 만끽했다.
“구절초 한가운데, 왜 ‘보물 제65호’ 석탑이 서 있을까”

이곳의 공식적인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708에 위치한 도봉서당이다. 하지만 방문객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서당 뒤편 언덕, 만개한 구절초 군락 한가운데에 묵직하게 서 있는 석탑이다. 바로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이다.
이 석탑은 1963년 일찌감치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시대의 귀중한 유산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독특함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화강암 석탑과 달리, 마치 흙으로 구운 벽돌(전돌)을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돌로 정교하게 모방했다.
바닥돌 위에 8개의 거대한 직사각형 돌을 2단으로 쌓아 올린 기단부 역시 경주 지역 탑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양식으로, 구절초의 부드러움과 석탑의 견고함이 빚어내는 극적인 대비는 이곳에서만 가능한 경험이다.
“꽃밭의 입구, 조선 문신의 학덕을 기리다: 도봉서당”

구절초 언덕으로 향하는 길목은 도봉서당이 지키고 있다. 언뜻 평범한 고택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곳 역시 2006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제401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공간이다.
도봉서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황정의 학덕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즉, 단순히 공부만 하던 서당이 아니라 제사를 모시고 가문의 유산을 돌보던 공간이었다.
솟을대문 격인 숭앙문을 비롯해 중심 강당인 도봉서당, 추보재, 연어재, 상허당 등 총 7동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조선 시대 건축의 단아함을 보여준다.
하늘하늘한 핑크빛과 하얀빛의 구절초가 고풍스러운 서당의 처마와 어우러지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다. 관람객들은 서당을 가볍게 둘러보며 조선 시대의 숨결을 느끼고, 곧이어 펼쳐질 신라의 유산(석탑과 고분)과 마주하게 된다.
신라 고분군을 배경으로 걷는 ‘하늘 산책로’

도봉서당 뒤편의 구절초 군락지는 완만한 언덕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데크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누구나 쉽게 꽃밭 사이를 거닐 수 있다. 올해(2025년)는 특히 이 풍경을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포토존이 설치되어 방문객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산책로의 백미는 단연 ‘배경’이다. 언덕 위 벤치에 앉아 구절초 꽃밭을 바라보면, 그 너머로 거대한 능선처럼 신라 고분군이 펼쳐진다. 이곳은 경주 서악동 고분군으로, 진흥왕릉, 진지왕릉 등 신라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보물 석탑을 발아래 두고, 멀리 신라 왕릉을 조망하며 새하얀 구절초 사이를 걷는 경험은 경주가 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지 실감하게 한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가 함께 흐르는 곳”이자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가장 ‘경주다운’ 가을을 만나는 곳

10월 중순을 지나며 만개한 경주 서악동의 구절초는 단순한 가을꽃이 아니다. 그것은 보물 제65호 석탑의 기단이 되고, 도봉서당의 담장이 되며, 신라 왕릉의 들판이 된다.
아직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가을 산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고요히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 인파에 지쳐 조용한 여유를 찾고 싶다면, 역사의 숨결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경주 서악동 도봉서당 뒤편 언덕이 그 해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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