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황금빛으로 뒤덮인 400년 은행나무 무료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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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운곡서원 은행나무
천년고도에 숨은 황금빛 비밀정원

운곡서원 은행나무 전경
운곡서원 은행나무 전경 / 사진=ⓒ한국관광공사 노명유

11월의 경주, 발 디딜 틈 없는 황리단길과 대릉원의 인파에서 벗어나 숨겨진 보석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한적한 시골 마을로 향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거대한 은행나무가 수만 장의 잎을 황금빛 융단처럼 쏟아내는 곳. 하지만 이 압도적인 풍경 뒤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108년의 단절과 복원이라는 깊은 역사가 숨겨져 있다.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운곡서원 은행나무’로 알고 있는 이 나무의 진짜 무대는 서원이 아니다. 그 옆에 자리한 작은 정자 ‘유연정’ 앞마당이다.

이곳은 서원철폐령이라는 역사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스러졌던 교육의 전당이 100여 년 만에 다시 일어선 집념의 공간이기도 하다.

경주 운곡서원 은행나무

운곡서원 은행나무
운곡서원 은행나무 / 사진=경주문화관광

이곳의 공식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사라길 79-13, 운곡서원이다. 하지만 방문객의 탄성을 자아내는 주인공은 서원 건물군에서 살짝 벗어난 동쪽 계곡 용추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경주 유연정이다. 1811년(순조 11년) 안동 권씨 문중에서 조상들을 추모하고 도연명의 자연 사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정자는 그 자체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이 유연정 앞에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수령은 300년에서 400년 사이로 추정되며, 높이 약 30m, 둘레 5.3m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은행나무
은행나무 / 사진=경주시 공식 블로그

이 나무는 1982년 10월, 경상북도가 공식 지정한 ‘보호수’다. 1811년 유연정이 세워질 때 이미 장년의 모습이었거나, 혹은 그 이전에 심어져 정자의 건립 과정을 모두 지켜봤을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11월 초·중순 절정기에 이곳을 찾으면, 유연정의 고풍스러운 팔작지붕과 그 위를 뒤덮은 황금빛 은행잎이 한 폭의 동양화를 완성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쏟아지는 ‘은행잎 비’는 이 시기에만 만날 수 있는 한정판 풍경이다.

108년의 공백, 서원철폐령과 복원의 역사

운곡서원 가을 풍경
운곡서원 가을 풍경 / 사진=경주문화관광

그렇다면 운곡서원은 어떤 곳일까? 이 서원은 본래 1784년(정조 8년) 지방 유림들이 ‘추원사(追遠祠)’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고려 태사이자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과 조선시대 인물인 권산해, 권덕린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흥선대원군의 1868년 ‘서원철폐령’은 이곳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전국의 수많은 서원과 함께 운곡서원 역시 훼철되는 비운을 맞았다.

운곡서원 은행나무 모습
운곡서원 은행나무 모습 / 사진=ⓒ한국관광공사 SONI ADITYA

그로부터 10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1976년, 후손들의 간절한 염원과 노력으로 서원은 마침내 현재의 자리에 복원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이 본래 신라시대 사찰인 ‘밀곡사(密谷寺)’가 있던 터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천년고도 경주답게, 신라의 불교 문화와 조선의 유교 문화가 한 공간에서 시간을 달리하며 겹쳐진 역사의 층위를 보여준다.

복원된 서원은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경덕사’를 가장 높은 곳에 두고, 그 아래로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던 강당 ‘정의당’,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를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붐비는 황리단길 대신 얻는 사색의 시간

운곡서원 가을 전경
운곡서원 가을 전경 / 사진=경주문화관광

경주 여행이라 하면 흔히 대릉원의 고분 능선이나 첨성대, 그리고 젊은 감각으로 가득 찬 황리단길을 떠올린다.

이들 명소는 저마다의 매력이 뚜렷하지만, 주말이나 성수기에는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와 높은 상업성으로 인해 고즈넉한 여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운곡서원경주 유연정은 경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강동면 청수골에 자리한 덕분에, 찾는 이들에게 온전한 평화와 사색의 시간을 허락한다.

운곡서원 은행나무
운곡서원 은행나무 / 사진=경주문화관광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무료’로 누리는 ‘고요함’이다. 방문객을 위한 별도의 입장료가 없으며, 주차비 또한 무료다. 주차 공간은 서원 입구에 약 2곳이 마련되어 있으며, 소형차 기준 약 80대를 수용할 수 있어 비교적 여유롭다.

다만 서원 건물 내부는 안동 권씨 문중에서 관리하므로 평시에는 관람이 제한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핵심인 유연정과 은행나무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바쁜 일상에 쉼표가 필요할 때, 화려한 볼거리 대신 마음을 채우는 깊이 있는 여행을 원한다면 운곡서원은 최고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

단순한 ‘인생 사진’ 명소를 넘어, 역사의 상처를 극복하고 108년 만에 다시 피어난 집념의 공간에서 진짜 ‘쉼’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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