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은행나무가 만든 황금 계단”… 입장료·주차비 없이 즐기는 가을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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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함안향교
500년 은행나무가 만든 황금빛 카펫의 가을

함안향교
함안향교 / 사진=함안 공식블로그 서지현

가을이 1년 중 단 한 번 허락하는 가장 사치스러운 색, 황금빛을 만나러 경상남도 함안으로 떠날 때가 왔다. 수많은 은행나무 명소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는 지금,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서 입장료나 주차비 부담 없이 압도적인 가을의 절경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된 함안향교다. 이곳은 단순한 포토 스팟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포화도 견뎌내고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묵묵히 조선 시대 배움터를 지켜온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다. 11월 초, 절정으로 향하는 황금빛 카펫의 서사를 제대로 만나보자.

1590년의 숨결, 문화재의 가을을 걷다

함안향교 은행나무
함안향교 은행나무 / 사진=함안 공식블로그 서지현

함안향교는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덕암길 103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1982년 8월 2일,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 기록에 따르면, 함안향교는 1590년(선조 23)에 처음 세워졌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피하지 못하고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지어졌다. 우리가 지금 걷는 이 땅은 전란의 아픔을 딛고 학문의 뜻을 이어가려 했던 조선 유생들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이 유서 깊은 공간은 놀랍게도 연중무휴, 별도의 입장료 없이 개방된다. 도심의 잘 꾸며진 공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간의 무게와 고풍스러운 단청, 그리고 가을의 색이 어우러져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닫힌 정문 공략, 아는 사람만 아는 ‘옆문’

함안향교 가을
함안향교 가을 / 사진=함안 공식블로그 서지현

처음 이곳을 방문한다면 굳게 닫힌 정문(외삼문) 앞에서 당황하기 쉽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 없다. 이곳의 진짜 가을 출입문은 따로 있다. 정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담벼락을 따라 몇 걸음만 옮기면, 방문객을 위해 항상 열려있는 자그마한 옆문(협문)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시야는 온통 황금빛으로 물든다.

주차 역시 마찬가지다. 별도의 공식 주차장은 없지만, 향교 입구로 이어지는 덕암길 갓길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다. 이 ‘비밀의 문’과 ‘무료 주차’ 팁은 함안향교의 가을을 즐기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500년의 증인, 황금빛을 쏟아내는 암나무

함안향교 항공사진
함안향교 항공사진 / 사진=경상남도 공식블로그

옆문을 들어서자마자 방문객을 압도하는 것은 바로 수령 약 400년에서 500년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은행나무 고목이다. 이 나무는 향교가 이곳에 다시 자리를 잡던 1600년대 초부터 이 모든 역사를 지켜본 살아있는 증인이다.

이 고목은 열매를 맺는 ‘암나무’다. 가을이면 황금 잎과 함께 수많은 은행 열매를 쏟아낸다. 이로 인해 특유의 냄새가 경내에 가득하고, 바닥은 푹신하지만 동시에 매우 미끄럽다.

하지만 이 냄새와 촉감마저도 500년 된 생명력이 선사하는 가을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이곳에서의 경험은 더욱 특별해진다. 미끄러운 은행 열매를 조심하며 천천히 걷는 것이 이곳을 즐기는 예의다.

돌계단 그리고 대성전

함안향교 가을 전경
함안향교 가을 전경 / 사진=경상남도 공식블로그

함안향교의 건축 배치는 유교적 질서가 뚜렷하다. 앞쪽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륜당이, 뒤쪽 언덕 위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자리한다. 이를 두고 ‘앞에는 학문을, 뒤에는 제사를’이라는 의미의 ‘전학후묘’ 배치라 부른다.

가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명륜당에서 대성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500년 된 은행나무가 쏟아낸 잎들이 계단을 빈틈없이 덮어, 세상에서 가장 푹신하고 사치스러운 ‘황금 카펫’을 만들어낸다.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찍는 사진은 이곳의 상징적인 구도다.

하지만 사진을 충분히 찍었다면, 반드시 가장 높은 곳인 대성전 앞마당까지 올라보길 권한다. 그곳에 서면 발아래 펼쳐진 황금빛 세상은 물론, 고풍스러운 기와지붕 너머로 함안면 일대의 고즈넉한 가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400여 년 전, 유생들이 바라보았을 그 풍경 속에서 잠시 바쁜 일상을 잊고 완벽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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