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곡운구곡, 학자의 길 따라 걷는 지질 탐방로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뛰어든 계곡에서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가. 그런데 만약 그 계곡이 수억 년의 지구사와 한 시대 지성의 고뇌를 동시에 품고 있다면 어떨까.

강원도가 8월의 명소로 선정한 화천 곡운구곡은 단순한 피서지를 넘어, 인문학적 성찰과 지질학적 탐험이 공존하는 특별한 장소다.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시대를 관통하는 깊이의 서사가 그곳에 흐르고 있다.

“조선 성리학자가 빚고, 지구가 조각한 아홉 가지 비경”

곡운구곡(谷雲九曲)은 강원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 844-2번지의 지촌천을 따라 약 5km에 걸쳐 펼쳐지는 아홉 개의 절경을 일컫는다. 이곳의 이름은 조선 숙종 대의 성리학자이자 서예가였던 곡운(谷雲) 김수증(1624~1701) 선생에게서 유래했다.

그는 속세를 떠나 학문과 수양에 정진할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들어와, 물길이 굽이치는 아홉 명소에 각각 시적인 이름을 붙였다.

봄이면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제1곡 ‘방화계’부터 층층이 쌓인 바위가 장관인 제9곡 ‘첩석대’까지, 그의 발길을 따라 명명된 아홉 개의 이름에는 자연에 귀의하고자 했던 성리학자의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당대 선비들이 추구했던 ‘구곡문화’의 정수로, 국내 여러 구곡 중 실제 경치가 이름과 함께 온전히 보존된 곳은 괴산의 화양구곡과 바로 이곳, 곡운구곡 단 두 곳뿐이라는 사실은 그 희소성을 증명한다.

도로 개설로 일부 풍경이 변했지만, 화강암이 빚어낸 수려한 암석 경관과 청정함은 여전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中庸)의 미(美)'”라 평한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살아있는 지질학 박물관, 국가지질공원의 심장

곡운구곡의 진정한 가치는 인문학적 배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곳은 2014년 국가로부터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강원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의 핵심 지질명소다.

발밑의 단단한 암반은 중생대에 형성된 화강암으로, 오랜 세월 빠른 물살에 깎여나가며 ‘포트홀(Pothole)’과 같은 다채로운 하천 지형을 만들어냈다.

특히 제1곡과 제3곡 사이에서는 지구의 더 깊은 속살을 엿볼 수 있다. 무려 25억 년 전 선캄브리아기에 생성된 변성암(호상편마암) 지대가 드러나 있는데, 이곳에서는 강력한 지각 변동의 증거인 미세한 습곡과 단층 구조를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이는 곡운구곡이 단순한 경관을 넘어, 한반도의 지질 형성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괴산 화양구곡이 화려하고 웅장한 화강암의 미학을 보여준다면, 곡운구곡은 깊고 은은한 변성암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지질학적 다양성에서 차별화된 매력을 발산한다.

이 특별한 가치를 더 많은 이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화천군은 8월 한 달간 다양한 여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곡운구곡 트레킹을 중심으로 산천어커피박물관, 평화의 댐 등을 연계하는 ‘화천 지질공원 시티투어’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또한, 계곡 인근에서는 화천의 대표 여름 축제인 ‘화천 토마토 축제’도 함께 열려 여정에 활기를 더한다. 강원도 관계자는 “여름철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걸으며 지질과 자연이 어우러진 특별한 여정을 경험해 보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