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재약산 사자평
숨겨진 가치와 두 가지 여정

가을의 끝자락, 온 산이 붉게 타오를 때 홀로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있다. 발아래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지휘하는 대로 일렁이는 억새의 군무.
많은 이들이 이 압도적인 풍경을 찾아 영남알프스로 향하지만,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알고 지나치기엔 너무나 깊은 이야기를 품은 곳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고산습지, 재약산 사자평이다. 이곳은 단순한 억새 명소를 넘어, 천년의 역사가 스며 있고 소중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자연의 박물관이다.
밀양 재약산 사자평

이야기의 무대는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에 자리한 천년고찰 표충사에서 시작되거나,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얼음골로 241의 얼음골케이블카에서 시작된다.
어떤 길을 택하든, 최종 목적지는 해발 1,000m 고지에 드넓게 펼쳐진 사자평 고산습지다. 축구장 수백 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약 400만㎡(약 120만 평)의 광활한 대지는 마주하는 순간 현실감을 잊게 만든다.
이 땅은 신라 시대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던 수련장이었고, 임진왜란의 위기 속에서는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나라를 지킬 힘을 길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시간이 흘러 6.25 전쟁 직후에는 80여 가구의 화전민들이 척박한 땅을 일구며 고랭지 채소를 키우고 약초를 캐던 치열한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당시 아이들을 위해 세워졌던 ‘하늘 아래 첫 학교’ 고사리분교는 화전민들이 모두 떠나면서 1996년 3월 1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사자평이 품은 애틋한 근현대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장구한 시간의 흔적 위로 지금의 억새가 자라나, 매년 가을이면 은빛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억새 너머의 진짜 보물

사자평의 진정한 가치는 비단 억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곳은 2006년 12월 28일, 환경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재약산 사자평 고산습지’라는 이름의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 면적만 587,253㎡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산지 습원이다. 고산지대에 이처럼 넓은 습지가 형성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다양한 멸종위기종과 희귀 동식물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은줄팔랑나비의 국내 최대 집단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습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독특한 생태계는 수많은 곤충과 양서류, 고산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명의 보고다.
두 가지 길 매력 전격 비교

사자평의 장엄한 풍경을 만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제 발로 땀 흘려 오르는 ‘수행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의 이기를 빌려 하늘에 오르는 ‘지름길’이다. 각 코스의 장단점은 뚜렷하여, 자신의 체력과 스타일에 맞는 선택이 필요하다.
표충사 출발 코스는 천년고찰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를 밟으며 오르는 길이다. 주차비 2,000원과 입장료 3,000원을 내고 산행을 시작하며, 흑룡폭포와 층층폭포, 고사리분교터를 거쳐 사자평에 이른다.
약 5~6시간이 걸리는 꾸준한 오르막길로 다소 힘들지만, 계곡의 물소리와 숲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등산의 과정과 자연, 역사를 함께 느끼고 싶은 여행자에게 추천된다.
반면 얼음골 케이블카 코스는 10분 만에 해발 1,020m까지 오를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이다. 왕복 요금은 19,000원이지만 주차는 무료다. 체력 부담 없이 풍경을 즐기고 싶은 가족 단위나 초보자에게 적합하다.
가을의 끝에서 만나는 가장 충만한 위로

재약산 사자평은 그저 스쳐 지나갈 아름다운 억새 군락지가 아니다. 천년 화랑의 기상과 나라를 지키려던 승병의 함성, 그리고 척박한 땅에서 희망을 일구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 켜켜이 쌓인 역사의 땅이다.
더불어, 위태로운 생명들을 품어주는 거대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번 가을, 붉은 단풍 대신 은빛 파도가 넘실대는 사자평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땀 흘려 한 걸음씩 오르든, 케이블카를 타고 편안히 오르든 중요하지 않다.
발아래 펼쳐진 광활한 대지 위에서 스쳐 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순간, 복잡했던 마음이 씻겨 내려가고 자연이 주는 가장 순수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자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넉넉한 선물이다.

















거기가 영남알프스에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