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엔 여기 꼭 걸어봐야 해요”… 진분홍 배롱나무로 가득한 무료 산책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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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항몽유적지
백일 동안 이어지는 배롱나무 꽃바다

제주 배롱나무 명소
항몽유적지 배롱나무 / 사진=제주항파두리유적 홈페이지

교과서 속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라는 묵직한 수식어. 어쩌면 그 무게감 때문에 여행 리스트의 뒷장으로 밀려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5년 8월의 제주는, 역사의 현장이 품은 눈부신 반전에 열광하고 있다.

750여 년 전 처절했던 함성이 잠든 그 땅 위로, 백일 동안 지지 않는 진분홍빛 배롱나무 꽃이 구름처럼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제주 항목유적지

제주 항몽유적지 배롱나무
항몽유적지 배롱나무 / 사진=제주항파두리유적 홈페이지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에 위치한 국가사적 제396호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약 20분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인데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입장료와 주차비까지 모두 무료라 부담 없이 들르기 좋다.

문화재청이 “고려 시대 대몽항쟁의 마지막 보루”라 명명한 이곳은, 강화도와 진도를 거쳐온 삼별초가 최후의 보루를 쌓고 항전했던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항파두리 토성길
항파두리 토성길 / 사진=제주항파두리유적 홈페이지

하지만 여름의 절정에 이곳을 찾는다면, 비장미 대신 화사한 생명력에 먼저 압도당하게 된다. 바로 토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군락을 이룬 배롱나무 덕분이다.

‘목백일홍’, 즉 백일 동안 붉게 피어있다는 이름처럼, 한여름에 꽃망울을 터뜨려 가을까지 그 화려함을 뽐내는 이 나무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 잔디를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 꽃송이는 강렬한 색의 대비를 이루며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제주 배롱나무
항몽유적지 배롱나무 / 사진=제주항파두리유적 홈페이지

이곳의 배롱나무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제주다운 이야기가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제주에서는 이 나무를 ‘저금타는낭’이라 부르는데,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의 정겨운 방언이다.

매끄러운 나무줄기를 살살 긁으면 나무 전체가 간지럼을 타듯 파르르 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방문객들은 꽃그늘 아래 마련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으며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직접 확인해보곤 한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히 아름다운 꽃구경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주 올레길 16코스의 일부이기도 한 토성을 따라 걷다 보면, 화려한 배롱나무 군락 너머로 몽골군에 맞서기 위해 쌓았던 처절한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잔잔한 언덕처럼 보이는 토성 산책로는 사실 나라를 지키려던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서린 방어선이었던 셈이다.

항몽유적지 배롱나무
항몽유적지 배롱나무 / 사진=제주항파두리유적 홈페이지

이처럼 한 공간 안에서 과거의 치열함과 현재의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은 다른 어떤 제주의 명소에서도 쉽게 얻기 힘든 깊은 감동을 준다.

봄에는 유채, 초여름에는 수국이 피어나지만, 삼별초의 붉은 충절을 닮은 듯한 여름의 배롱나무는 그 어떤 꽃보다 이 땅의 서사와 강렬하게 어우러진다. 렌터카를 반납하기 전 잠시 들를 곳을 찾는다면, 혹은 제주의 수많은 포토 스팟 속에서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고 싶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750년의 시간을 넘어, 비극의 역사 위를 꿋꿋하게 피어난 진분홍 꽃구름이 전하는 뜨거운 위로와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그곳에서 당신은 가장 아름답고도 가슴 뭉클한 제주의 여름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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