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노꼬메오름
바람 타고 출렁이는 은빛 절경

가을이 깊어지면 제주의 바람은 특별한 악기가 된다. 수만, 수십만 개의 억새 이삭을 스치며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소리를 빚어낸다. 그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때로는 교향곡처럼 웅장하게 연주되는 무대가 있다.
어떤 이는 그곳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어떤 이는 고요한 위로를 얻어간다. 하나의 입구에서 시작되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가을 멜로디를 품고 있는 곳, 바로 노꼬메오름의 은빛 왕국이다.
능선을 따라 포효하는 은빛 갈기

억새의 대서사시를 경험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큰노꼬메오름으로 향해야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산 138에 자리한 이곳은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을 지나 지그재그 모양의 입구를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억새의 바다가 펼쳐진다.
특히 정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능선길은 이 오름의 백미다. 길 양옆으로 도열한 억새들이 바람에 맞춰 일렁일 때면, 마치 거대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해발 833.8m(등반고도 약 234m)의 정상에 서는 순간, 숨 가쁜 오르막은 완벽한 보상으로 돌아온다. 발밑으로는 방금 헤쳐 나온 억새의 물결이 오름 전체를 뒤덮어 장관을 이루고, 시선을 들면 서쪽의 비양도부터 등 뒤의 한라산까지 제주의 서부 비경이 막힘없이 펼쳐진다.
새별오름의 억새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압도하는 매력이라면, 큰노꼬메오름의 억새는 가파른 능선을 따라 역동적으로 흘러내리며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는 ‘관계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것은 제왕의 자리에서 자신의 왕국을 내려다보는 듯한 웅장하고도 장엄한 경험이다.
숲길에서 마주하는 억새의 속삭임

큰노꼬메오름이 웅장한 교향곡이라면, 그 곁의 족은(작은)노꼬메오름은 고요한 독주곡이다. 화려한 무대보다 조용한 사색을 원한다면 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족은노꼬메오름의 억새는 큰형처럼 군락을 이루어 압도하기보다, 울창한 숲길 사이사이에 수줍은 듯 피어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릴 때,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억새 이삭들은 마치 비밀의 정원에 숨겨진 보석과도 같다.
해발 777.9m(등반고도 약 145m)에 이르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편안한 트레킹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이곳에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소리를 더 가까이, 더 내밀하게 들을 수 있다.
최고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한 안내서

이 가을의 교향곡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무료지만, 억새의 춤을 만드는 그 바람은 정상에서 훨씬 더 차갑고 거세다.
땀이 식으며 느끼는 추위가 아닌, 아름다운 풍경을 편안히 감상하기 위한 ‘관람용 예복’으로 바람막이를 반드시 챙겨야 한다. 또한, 탐방로는 약 4.6km,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소요되므로 편안한 신발은 필수다.
‘높고 뾰족한 산’이라는 뜻의 ‘놉고메’에서 유래한 노꼬메오름. 그 이름처럼 솟아오른 두 봉우리는 이번 가을, 전혀 다른 두 개의 연주를 준비하고 당신을 기다린다. 가슴 벅찬 감동의 클라이맥스를 원하는가, 아니면 마음을 다독이는 조용한 선율을 원하는가. 당신의 선택에 따라, 노꼬메오름은 잊지 못할 당신만의 가을 사운드트랙을 선사할 것이다.

















전체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