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 ‘마르형 분화구’ 산굼부리
10월 억새 절정, 오전 방문이 최적

가을 제주를 상징하는 풍경은 단연 바람에 일렁이는 은빛 억새의 바다다. 수많은 명소가 있지만, 여행자들이 1순위로 꼽는 곳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산굼부리다.
하지만 이곳을 그저 ‘억새가 아름다운 오름’ 정도로 생각하고 방문한다면, 그 장엄한 풍경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셈이다. 눈앞의 억새밭에 감탄하며 셔터를 누르다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방문객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구멍과 마주하며 압도당한다.
이곳은 아름다운 억새밭이라는 커튼 뒤에, 대한민국 유일의 희귀한 지질학적 경이를 숨기고 있는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 그 자체다.
국내 유일 ‘마르형 분화구’

산굼부리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768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핵심 가치는 1979년 6월 21일,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이유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제주에는 약 360여 개의 오름(기생화산)이 흩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오르는 새별오름이나 용눈이오름 등 대부분의 오름은 화산재가 쌓여 봉긋하게 솟아오른 ‘분석구(Cinder Cone)’ 형태다. 하지만 산굼부리는 그 태생부터 다르다.

이곳은 뜨거운 마그마가 지하를 흐르다 차가운 지하수를 만나 발생한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지표면을 통째로 폭발시키며 형성된 ‘마르(Maar)형 분화구’다. 용암이나 화산재가 쌓여 산을 이룬 것이 아니라, 폭발로 인해 땅이 거대하게 움푹 팬 것이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분화구의 둘레는 약 2km(2,070m)에 달하며, 깊이는 백록담(약 115m)보다 깊은 약 132m에 이른다. 반면 산 자체의 높이는 약 100m에 불과해, ‘산보다 분화구가 더 큰’ 독특한 형태를 띤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산굼부리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지질학적 현상이다.
132m 깊이에 숨겨진 ‘분화구 식물원’

산굼부리의 경이로움은 거대한 규모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분화구 내부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보존된 ‘분화구 식물원’이라 불린다.
깊은 그릇 형태의 독특한 구조 덕분에, 분화구 내부에는 햇빛의 양과 습도에 따라 전혀 다른 생태계가 공존한다. 햇빛이 잘 드는 북쪽 사면에는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등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난대성 수목이 군락을 이룬다.
반면, 햇빛이 적게 드는 남쪽 사면에는 서어나무, 단풍나무 등 비교적 서늘한 곳의 온대성 낙엽수림이 울창하다.

이처럼 한정된 공간 안에서 난대림과 온대림이 공존하는 모습은 식물 지리학적 연구에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억새밭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원시림은 산굼부리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왜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보호받아야 하는지를 증명한다. 분화구 내부에는 왕쥐똥나무 군락지를 비롯해 복수초, 변산바람꽃 등 희귀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어 생태학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새별오름과 비교하면 어떨까

제주의 가을 억새 명소로 산굼부리와 자주 비교되는 곳이 바로 ‘새별오름’이다. 두 곳 모두 압도적인 억새 풍경을 자랑하지만, 경험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새별오름은 경사가 가파르고 정상까지 약 30분간의 등반이 필요하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쯤 정상에 서면, 서쪽 해안선과 비양도까지 막힘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 뷰와 함께 능선을 따라 물결치는 억새를 만날 수 있다. 역동적이고 탁 트인 조망을 선호한다면 새별오름이 좋은 선택이다.

반면 산굼부리는 접근성이 훨씬 뛰어나다. 약 10~20분의 완만한 산책로(계단길/언덕길)만 오르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정상부에 닿는다. 이곳의 매력은 조망이 아니라 ‘깊이’에 있다.
방문객들은 분화구를 중심으로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한쪽으로는 시시각각 빛에 따라 변하는 억새밭을, 다른 한쪽으로는 아득한 깊이의 원시림을 동시에 감상한다.
한 방문객은 “새별오름이 억새를 보러 ‘올라가는’ 곳이라면, 산굼부리는 억새와 함께 거대한 자연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곳”이라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10월 절정기 방문 팁과 공식 요금

물론 지질학적 가치를 차치하더라도, 10월 중순에서 11월초까지 절정을 이루는 억새 군락은 산굼부리를 방문해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다.
탐방로는 입구에서 분화구 정상 전망대까지 잘 정비되어 있다.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가파른 계단길을 이용하면 약 10분 만에 정상에 도착해 탁 트인 분화구와 억새밭을 조망할 수 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은 약 20분 정도 소요되지만, 유모차나 휠체어 이용객은 물론 노약자나 어린이도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방문 전 운영 정보 확인은 필수다. 산굼부리는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계절에 따라 마감 시간이 다르다. 제주시 공식 관광 포털에 따르면 3월부터 10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운영하며, 입장은 오후 6시에 마감된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11월부터 2월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40분까지 운영하고, 입장은 오후 5시에 마감된다.

입장료는 2025년 10월 공식 포털 기준 성인(대학생 포함) 6,000원, 청소년 및 어린이(만 4세 이상), 경로(만 65세 이상), 제주도민, 국가유공자, 장애인은 4,000원이다. (신분증 지참 필수) 일부 블로그나 과거 정보에 7,000원으로 기재된 경우가 있으나, 공식 요금은 6,000원이 정확하다.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주차비는 무료다. 10월 주말, 은빛 억새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에는 이른 오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해가 질 무렵의 황금빛 억새도 장관이지만, 정오 이전에 방문하면 비교적 여유롭게 주차하고 정상에서 제주의 가을바람과 함께 수만 년 전 거대한 폭발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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