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민둥산
국내 억새 명소 중 으뜸

가을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우리 마음은 산으로 향한다. 특히 정선 민둥산은 은빛 억새가 온 산을 뒤덮어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가을 산행의 성지다. 그러나 정상의 화려한 풍경에만 감탄한다면 이 산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셈이다.
민둥산의 진정한 매력은 발밑에 숨겨진 수억 년의 지질학적 비밀과, 그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물이라는 데 있다. 억새의 장관 아래 숨은 땅의 이야기를 탐구해 본다.
민둥산 억새

민둥산은 공식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남면 무릉리 산223-2’ 일원에 자리한, 해발 1,118.8m의 고산이다. 7부 능선까지 울창한 숲길을 오를 때는 평범한 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고도를 높여 시야가 트이기 시작하면, 발밑 곳곳이 움푹 파인 독특한 지형이 등산객을 맞는다. 바로 이 산의 핵심 비밀인 ‘돌리네’다.
이는 민둥산의 기반암인 석회암이 오랜 세월 빗물에 녹는 ‘용식 작용’을 겪으며 형성된 것이다. 마치 설탕이 물에 녹듯, 약산성을 띤 빗물이 석회암을 서서히 녹여내며 땅 표면을 주저앉힌다.
이런 지형을 통틀어 카르스트 지형이라 부르며, 민둥산 정상부는 국내에서 이를 가장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발밑의 크고 작은 웅덩이들은 우리가 지금 수억 년 전 바다였던 땅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한다.
억새 바다를 만든 두 가지 열쇠

그렇다면 2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억새밭은 어떻게 산 정상을 뒤덮을 수 있었을까?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이 척박한 카르스트 지형이다. 물 빠짐이 매우 심한 석회암 토양은 깊게 뿌리내려야 하는 큰 나무들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을 제공했다. 이 자연적 조건이 생명력 강한 억새가 다른 식물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산 전체를 뒤덮는 결정적 바탕이 되었다.
두 번째 열쇠는 사람의 역사다. 놀랍게도 현재의 장관은 1970년대까지 이곳에서 삶을 영위했던 화전민들의 흔적이다. 당시 화전민들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산에 불을 놓았고, 경작이 끝난 뒤 버려진 땅에 가장 먼저 뿌리내린 것이 바로 억새였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려던 치열한 삶의 노력이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최고의 경관을 빚어낸 것이다. 이처럼 민둥산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든 공간이며, 그 독특한 생태적·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성공을 보장하는 코스 선택

민둥산 산행은 경사가 완만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총 4개의 등산 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으며, 입장료나 주차료는 모두 무료다.
가장 대중적인 코스는 ‘증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1코스다. 총거리 약 3.2km로, 완만한 숲길을 따라 오르면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내외로 정상에 닿을 수 있다. 길이 험하지 않고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초보자나 가족 단위 산행객에게 안성맞춤이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고 싶다면 ‘거북이쉼터’에서 시작하는 최단 코스가 해답이다. 정상까지 약 30~40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곳까지 향하는 임도는 매우 중요한 변수가 있다.

억새꽃 축제 기간이나 주말, 공휴일에는 일반 차량의 진입이 통제될 가능성이 높다. 통상 오전 7시 이전이나 오후 4시 이후에 통제가 풀리는 경우가 많으니, 방문 전 정선군 종합관광안내소(1544-9053)를 통해 차량 통제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현명하다.
매년 가을이면 민둥산에서는 억새꽃 축제가 열린다. 2025년 공식 일정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통상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이어지므로 이 시기에 방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국내에는 여러 억새 명소가 있지만, 민둥산은 뚜렷한 차별점을 가진다. 바로 군락의 규모다. 정상부 분지에 억새가 밀집한 다른 산들과 달리, 민둥산은 정상에서부터 모든 능선을 따라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파노라마 뷰를 자랑해 시각적 웅장함이 압도적이다.
이번 가을, 단순히 눈으로만 즐기는 산행을 넘어 발밑의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수억 년의 시간과 사람들의 역사가 빚어낸 은빛 파도 속을 걸으며, 자연의 위대함과 삶의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껴보기를 바란다.
정선 민둥산은 분명 당신의 가을에 잊지 못할 한 페이지를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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