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배티 성지
설경이 어우러진 힐링 순례지

가을의 화려함이 지나간 자리에 하얀 눈꽃이 피어나면 충북 진천의 깊은 산골은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서운산 자락 배티고개 아래 위치한 이곳은 과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찾아든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며 숨어 살던 비밀 교우촌이었습니다.
지금은 은은한 눈발 사이로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은 성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다가옵니다.
진천 배티 성지

이곳 배티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자 땀의 순교자라 불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습니다.
1821년에 태어나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마카오와 만주에서 수학한 후 1849년 사제품을 받고 귀국했습니다. 이후 최 신부는 매해 약 2,800km에 달하는 험준한 산길을 발로 뛰며 전국의 공소를 순방했습니다.
박해받는 신자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하고 한글로 된 천주가사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던 그의 헌신적인 삶은 배티 성지 곳곳에 깊게 배어 있습니다. 특히 1850년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 의해 세워진 조선 최초의 신학교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 천주교사에서 배티가 가지는 위상을 증명합니다.
설경 속에 담긴 아픈 역사와 형구돌

성지 입구에서 대성당을 지나 순례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요한 눈밭 위로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형구돌을 마주하게 됩니다.
일명 순교돌이라고도 불리는 이 커다란 석물은 본래 건축용이었으나 천주교 박해기에 신자들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조금 더 발길을 옮기면 병인박해 당시 체포된 신자들을 묶어 두었다는 순교 현양비가 나타납니다. 원래 백곡저수지 축조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곳으로 이전되어 현재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얗게 쌓인 눈은 그날의 아픈 상처를 덮어주듯 성지를 조용히 감싸 안으며 방문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달합니다.
순례 코스와 체험 공간

배티 성지는 방문객의 체력과 목적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4가지 순례 코스를 갖추고 있습니다. 산상제대와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는 길목마다 우거진 소나무가 눈을 머금고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정화가 일어납니다.
성지 하단에 위치한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2014년에 개관한 현대적 공간으로 6개의 전시실을 통해 입체적인 역사 체험을 제공합니다.
박물관 내부에는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된 순교자들의 삶이 전시되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 역사를 이해하기에도 좋습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스며드는 은은한 빛이 설경과 어우러져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이용 정보

겨울철 배티 성지를 방문할 계획이라면 운영 시간 변동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동절기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만 운영하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입니다.
입장료와 주차료는 모두 무료이며 약 50대 규모의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진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양백리행 버스를 타면 약 40분 정도 소요되지만 배차 간격이 다소 길어 자가용 이용이 편리합니다. 성지 미사는 매일 오전 11시에 봉헌되므로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더욱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최근 충청북도는 배티 성지를 포함한 천주교 유산을 근현대 문화자산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을 제천 배론 성지 등과 연계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종교와 문화를 아우르는 치유의 관광 코스로 개발한다는 방침입니다.
신앙의 역사를 넘어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와 숭고한 정신을 동시에 품고 있는 배티 성지는 단순한 종교 시설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눈 덮인 성당의 압도적인 고요함 속에서, 바쁜 일상에 지친 마음을 다독이고 차분하게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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