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물영아리오름
제주의 오름 속 비밀의 호수

제주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지만, 정상에 ‘하늘을 담은 호수’를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심지어 그 작은 호수가 전 세계가 함께 보호하기로 약속한 ‘람사르 습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의 영험한 산’이라는 뜻을 지닌 물영아리오름은 바로 그런 곳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곳, 힘겨운 여정의 끝에서 자연이 주는 가장 완벽한 보상을 만날 수 있는 신비의 오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주 물영아리오름

물영아리오름 탐방의 가장 큰 매력은 뚜렷하게 구분된 두 개의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755번길 81의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면, 당신의 체력과 취향에 따른 즐거운 고민이 시작된다.
첫 번째 선택지는 ‘정상 코스‘다. 왕복 약 1.2km, 1시간 남짓 소요되는 이 길은 최단 거리로 정상의 습지를 만나기 위한 집중 코스다. 초반의 완만한 숲길을 지나면 이내 악명 높은 나무 계단이 시작된다. 끝이 보이지 않을 듯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절로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되지만, 그 끝에서 마주할 비경을 생각하면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두 번째 선택지는 ‘둘레길 코스‘다. 약 5.3km,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 걸리는 이 길은 오름의 허리를 완만하게 한 바퀴 도는 평화로운 산책로다.
가파른 오르막에 자신이 없는 탐방객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에게 안성맞춤이다. 제주의 전통 목축 유산인 ‘중잣성’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유유히 풀을 뜯는 소떼와 목가적인 중산간의 풍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하늘을 비추는 거울, 람사르 습지

대부분의 탐방객이 선택하는 정상 코스의 진정한 보상은 모든 계단이 끝나는 순간 거짓말처럼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던 숲이 사라지고, 움푹 파인 분화구 안에 고요한 습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2006년, 세계적으로 그 보전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물영아리오름의 심장부다.
둘레 약 300m, 깊이 40m의 분화구 습지는 날씨에 따라 천의 얼굴을 보여준다. 바람 없는 맑은 날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거대한 거울이 되고, 흐린 날에는 물안개가 피어올라 신선이 노닐 법한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비가 많이 온 뒤에는 백록담처럼 물이 가득 차올라 신비로운 산정호수가 되기도 한다. 이 작은 습지에는 멸종 위기종을 포함한 수많은 동식물이 터를 잡고 있어,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생태 박물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셈이다.
습지를 둘러본 뒤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의 동부 오름 군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또 다른 장관을 선물 받는다. 다랑쉬오름, 높은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등 제주의 내로라하는 오름들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영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입구

물영아리오름은 생태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이야기도 품고 있다. 탐방이 시작되는 드넓은 초원은 영화 ‘늑대소년’에서 주인공들이 교감하던 바로 그 장소다.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은 오름에 오르기 전부터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또한, 탐방로 곳곳에서 만나는 ‘중잣성’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다. 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국영 목장의 경계로, 제주 사람들의 고단했던 삶과 역사가 켜켜이 쌓인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힘들게 오른 만큼 더 큰 감동을 주는 곳. 자연의 경이로움과 역사, 문화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물영아리오름은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도 단연 특별한 존재다. 이번 여행에서는 잠시 세상의 소음을 잊고, 하늘을 품은 이 신비로운 습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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