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사·백양사 사이, 진짜 단풍은 여기에 있었네”… 500년 넘게 비밀로 남은 가을 절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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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은행나무, 구암사 앞을 수놓다
내장산·백양사 사이 숨은 단풍 명소

순창 구암사 가을
순창 구암사 가을 / 사진=순창군공식블로그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다. 이맘때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악산, 내장사, 선운사, 백양사 등은 절경을 보려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하지만 단풍 명소의 ‘성지’로 불리는 내장사와 백양사, 그 두 거대한 사찰 사이에 500년 넘게 비밀처럼 숨겨진 ‘진짜’ 명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순창 구암사 전경
순창 구암사 전경 / 사진=ⓒ한국관광공사 황성훈

워낙 깊은 산골짜기, 행정구역상 전북 순창이지만 수십 미터만 옮기면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이 되는 3도 경계의 오지에 자리한 탓이다. 바로 천년고찰 구암사(龜巖寺)와 그 앞마당을 지키는 600년 수령의 거대한 은행나무다.

절 앞의 거대한 산 그림자를 고요히 품고, 그 곁에 선 고목이 온통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풍경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같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600년 세월이 빚은 36m 은행나무

순창 구암사 은행나무
순창 구암사 은행나무 / 사진=순창군공식블로그

순창 구암사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다. 이 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392년(조선 태조 원년)에 심어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가 구암사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고 태조 임금의 안녕과 조선 왕조의 번창을 염원하며 직접 심은 노거수다.

나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키가 무려 36m에 달해, 성인 남자의 20배가 훌쩍 넘는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 ‘체형’이다. 보통 수백 년 된 노거수들이 펑퍼짐한 인상을 주는 반면, 이 나무의 가슴둘레는 5m 정도로 키에 비해 매우 가늘다. 60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늘씬하게 쭉 뻗은 독특한 수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고고하고 도도한 기품을 풍긴다.

이 나무가 더욱 경이로운 이유는 그 생명력에 있다. 6.25 전쟁 당시, 구암사 일대는 격전지가 되어 사찰 대부분과 주변 숲이 크게 불타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은행나무만은 아무런 피해 없이 그 자리를 지켜내, 오늘날까지 황금빛 단풍을 피워내고 있다.

천년고찰 ‘구암사’

순창 구암사 대웅전
순창 구암사 대웅전 / 사진=ⓒ한국관광공사 황성훈

은행나무의 터전인 구암사 역시 예사롭지 않은 역사를 품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선운사의 말사인 이곳은 백제 무왕 37년인 서기 636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사찰 동편에 숫거북(龜) 모양의 바위(巖)가 있고 대웅전 밑에 암거북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학대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붓처럼 우뚝 솟은 ‘문필봉’을 가리키며 “후세에 이곳에서 선승과 문인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예언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순창 구암사
순창 구암사 / 사진=ⓒ한국관광공사 황성훈

그 예언처럼, 조선 영조 때부터 100여 년간 화엄종맥의 법손이 계승되며 전국 각처에서 1천여 명의 승려가 운집할 정도로 거대한 사찰로 번성했다.

화엄종주 백파선사, 설파선사, 영호 박한영 스님 등 불교계의 거두들이 모두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비록 전쟁으로 지금은 대웅전 등 몇 채의 전각만 남았지만, 그 법맥과 역사의 향기는 600년 은행나무와 함께 짙게 배어있다.

‘극악의 진입로’ 운전 주의

순창 구암사 가을 전경
순창 구암사 가을 전경 / 사진=순창튜브

이토록 신비로운 풍경을 만끽하는 데 드는 비용은 입장료와 주차료 모두 ‘무료’다. 절 앞마당의 은행나무 주변으로 제법 넓은 주차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주차 자체는 여유롭다.

하지만, 이곳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진입로’다. 구암사로 올라가는 길은 산 위로 오를수록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만한 좁은 홑길이 이어진다.

게다가 경사로도 매우 급한 편이라, 운전이 미숙하거나 대형 차량을 운전할 경우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만약 마주 오는 차를 만나거나, 아침 이른 시간 살얼음이라도 낀 날에는 자칫 아찔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극악의 난이도’가 바로 이토록 아름다운 명소가 아직도 ‘비밀’로 남아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험난한 길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면, 구암사(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 374)는 내장산과 백양사의 인파 속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고요하고 장엄한 황금빛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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